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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와 장제스, 그리고 카이로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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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11-29 15:29 조회1,0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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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은 72년 전, 1943년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보장을 받은 카이로선언 공포일이다.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자유와 독립을 결의한다'고 명시한 특별조항은 중국의 장제스가 연합국 대표를 설득해서 이루어졌고, 배경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요인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義擧)였다.

김학준의 저서 '매헌 윤봉길 평전'에 의하면 임시정부는 청사의 집세가 밀리기 일쑤였고, 고용원의 월급마저 지급하지 못해 중국인으로부터 소송까지 당하는 처지였다. 만보산 사건 등으로 대한(對韓) 감정도 매우 나빴다. 김구 선생이 스스로 임정(臨政)을 "거지의 소굴"로 비유할 정도였고, 당시 임정 요인들은 쓰레기통을 뒤져 배추뿌리를 찾아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으로 중국 내 반일 감정이 폭발했다. 이듬해 일본이 중국 최정예 부대 19로군을 누르고 상하이를 점령하자 중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분노와 원한에 차 있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이 일왕 생일 행사와 승전 축하식을 하는 단상에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 일본의 상하이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등 침략 수뇌들을 처단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만주와 상하이에서 일본에 연달아 패퇴하여 국가적 수치를 당한 중국인에게 윤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그야말로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장제스는 윤 의사가 중국 100만 대군과 4억 중국인이 못 한 일을 해냈다고 극찬하며 고마워했다. 독립운동가 정회암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서 윤 의사의 의거로 임정이 살아나 중국 정부로부터 지원받고, 또 해방과 더불어 귀국할 때도 임정을 앞세워 떳떳하게 나서게 된 것도 모두 '윤 의사의 피 하나의 결과'라고 회고했다. 장제스는 1933년 5월에 백범 등 임정 수뇌를 초청하고 뤄양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의거 이틀 전 폭탄을 손에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윤봉길 의사. /조선일보DB
                                                                                       

1943년 4월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이든 외상이 전후 한국을 국제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한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외무부장 조소앙 등은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를 찾아가 미국과 영국이 한국의 장래에 국제 공동 관리안을 갖고 있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해 달라고 건의했다. 장제스는 한국 독립을 위해 미국과 영국에 힘껏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장제스는 약속대로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창했고 마침내 선언문 특별조항에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을 결의하여 11월 26일 확정하고, 테헤란에서 소련 스탈린의 동의를 확인한 후 그해 12월 1일 카이로선언이 공포됐다.

이승만 박사는 도왜실기(屠倭實記) 서문에서 윤 의사의 장거(壯擧)가 있은 이후로 중국 국민당 정부는 물론이요 장제스 주석 부처가 김구 선생을 절대로 신뢰하여 음으로 양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성원해준 것은 모두 이 때문이요, 그중에도 한국 해방의 단서가 된 '카이로회담'에서 장제스가 솔선해서 한국의 자주 독립을 주창해 연합국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 역시 그 원인(遠因)은 윤 의사의 장거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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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