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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매헌서포터즈_김현재]매헌 윤봉길,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탄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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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45회 작성일 23-06-1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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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서포터즈 김현재님의 게시글 

<매헌 윤봉길,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탄신일>을 소개합니다!

매헌기념관과  서포터즈의 SNS 계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올 한해 동안의 매헌서포터즈들의 활동 많은 기대와 응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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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포터즈 SNS : https://blog.naver.com/sillbupantum/223119714121


 

 

매헌 윤봉길,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탄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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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윤봉길의사, 윤봉길의사가 김구에게 교환한 회중시계

/출처: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안녕하세요. 매헌 서포터즈 현재입니다. 1365, 매일 열심히 살아가면서 단 하루,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이 있는데요, 기념일이 될 수도 있고, 시험에 합격하여 즐기는 순간 등 사람마다 생각하는 중요한 날은 전부 제각각으로,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생각해야 하는 날은 바로 생일입니다. , 하나의 생명이 태어난 날, 생명이 지구에서 생활하며 역사의 한 획을 긋고, 활동했던 날을 기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렸을 적에는 생일 선물을 받는 날이라고 그날만을 기다려왔었던 철 없던 과거가 있었지만, 지금에서 돌아보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키워주고 함께해주고 계신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늘 생각합니다.

 

지금은 태어난 날을 생일로 축하하지만,

역사적으로 돌아본다면, 독립운동이 있었던 날 외에도

기억해야 할 일자가 바로 생일이 아닐까요?”

 

매헌 윤봉길의사는 상하이 의거, 김구와 시계를 교환하면서 김구 선생님, 저와 시계를 바꾸시지요. 제게는 1시간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이라든지,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는 사실, 독립운동가이자 농민계몽을 위해 진행한 활동처럼 독립운동가이자 농촌계몽(민중교육 및 농촌부흥) 운동가라는 정체성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윤봉길의 생애, 특히 어린 시절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콘텐츠에서는 어렸을 적의 윤봉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생일은 621

농가에서 배우고,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며

 이후로 교육을 이어나가 성장한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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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서 강의하는 교재 중 하나로 유교 경전의 기본 문헌 <예기>

 /출처: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621일 오후 8, 충청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때 즈음이 바로 을사5조약이 체결된지 3년이 지나고, 일제의 통감부가 일제강점기의 시발점이 되었을 시기입니다.

 

목발이라고 불리는 마을에서 태어난 후, 한미한 시골을 배움터로 삼아 심신을 연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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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보통학교 동화교육 서적 <보통학교 수신서 권5> 

/출처: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그리고 1913년에 큰아버지 윤경에게서 한문을 배웠고, 1918년에 덕산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년 후, 3.1 독립운동에 자극을 받아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며 자퇴했습니다.

 

이후 1920, 매헌 윤봉길의사가 13살이 되던 해에 약 1년 동안 최병대 문하에서 한학을 배우고, 동아일보, 개벽 등을 통해 신문물과 신사상을 수용하며 성장했습니다.

1년이 지난 1921, 14살이 되던 해부터는 서당 오치서숙에 가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1923년에는 오치서숙 중추절 시회에서 장원하며 <한시집>, <명추>, <임추>, <옥타> 등의 시문집을 남겼습니다.

 

서당 오치서숙을 졸업하면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스승)으로부터 매헌이라는 아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실질적인 국권이 일제에 넘어가며 외교권 박탈, 군대 해산이 급박하게 이뤄지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농촌계몽 활동을 전개하며 농촌사회의 참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삶 자체가 스스로 시련을 극복하는 슬기와 용기를 익히는 계기가 되었으며 평범한 농가가 윤봉길 의사에게는 배움터로서 작용했습니다.

 

 

그 이후, 우리가 잘 아는 농촌계몽운동과 상하이 의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에 이러한 유년 시절이 있지 않았다면, 지금의 윤봉길 의사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농촌에서 배우고, 이후에 보통학교에서 겪은 현실을 보았기에 자퇴와 동시에 다른 배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콘텐츠를 통해 윤봉길 의사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고, 교육 과정에서 배운 순간순간이 나중에 어떻게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매헌서포터즈 김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