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람 정보

세계 대전의 거두들을 움직인 25세 청년의 자주독립 의지

카이로선언

카이로선언

제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이 각각 1943년 9월과 1945년 5월 연합국에 대하여 항복을 하였다. 반면 투항을 거부하던 일본은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으로 인해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하였으며, 이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35년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가 예상되자 1943년 11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주석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의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제2차 세계대전의 수행과 전후 처리 문제의 협의를 위한 ‘카이로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장제스 주석은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처칠 수상은 이를 반대하였으나, 루즈벨트 대통령과 합의하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있음을 유의하여,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에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라는 특별조항을 넣어 선언문을 확정하였다. 이후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소련의 스탈린 수상과 회담을 가졌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시한 특별조항에 대한 스탈린 수상의 동의를 확인 하였다. 최종 합의를 마친 카이로 선언문은 같은 해 12월 1일 대외적으로 공포되었다.

이후 1945년 7월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수상이 참석한 포츠담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재확인되었다. 한국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인 보장은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로 인하여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를 도와준 장제스의 노력과, 항일 독립운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카이로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가 예상되자 1943년 6월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의로 처칠 수상과 장제스 주석, 연합국의 세 거두가 제2차 세계대전의 수행과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같은 해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카이로에서 가졌던 회담이다. 당시 가장 중요한 사안인 대일전에 대해서는 서로 협력할 것임을 협의하였고, 더 나아가 일본이 패전했을 경우를 가정하여 일본의 영토 처리 문제에 대한 연합국의 기본방침을 결정하였다. 장제스 주석은 연합국 극동군사령관 자격으로 아시아를 대표해서 회담에 참석하였는데, 이는 미국이 전후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제스 주석은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일본이 패망하면 1914년 이후 일본이 차지한 만주와 대만, 팽호도 등의 영토는 중국에 반환한다는 것과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처칠 수상은 선언문에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한다’는 문구 대신에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문구를 사용할 것임을 주장하였다. 이에 중국은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한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병탄되었고 일본의 대륙정책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을 명시해야 함을 강조했다. 영국의 반대는 대영제국의 해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나 대외적으로는 소련이 위의 문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이유로 내세워 한국의 독립에 관한 조항을 수정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중국과 영국 사이의 한국 독립에 관한 의견 대립을 중재한 것은 회담 참석자인 소련주재 미국대사 윌리엄 해리먼이었는데, 그는 소련과 접촉하여 한국의 독립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받았다. 또한 영국은 버마전선에서 중국의 도움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있음을 유의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에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라는 특별조항을 넣어 11월 26일 선언문을 확정하였다. 이후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테헤란으로 이동하여 스탈린 수상을 만나 카이로에서 합의한 사항을 확인하였고, 같은 해 12월 1일 미·영·중 3국의 수도에서 동시에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었다. 선언문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상호 협력하여 일본에 대응하는 문제에 관한 조항이었으며, 또한 한국의 독립문제가 처음으로 보장된 연합국 회의였다.

장제스 주석이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창한 배경에는 중국이 1931년 9월 일본에게 만주를 빼앗기고, 곧이어 1932년 중국의 심장부인 상하이마저 침공당하여 중국민은 일본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윤봉길의사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의 상하이 승전과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식장에서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수괴들을 섬멸시킴으로써 이를 통쾌하게 갚아준 것에 있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에 큰 감명을 받은 장제스 주석은 이후 한국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돕기 시작했다. 한편 미·영 양국이 일본이 패전하는 경우 1942년부터 한국을 연합국에서 공동 관리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이 미국 워싱턴에서 보도되었으며, 또 카이로에서 연합국 회의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구 임시정부주석은 외교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광복군총사령관 이청천, 부사령관 김원봉과 안원생을 통역으로 대동하여 1943년 7월 장제스를 찾아갔다. 김구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며, 이에 장제스는 한국독립을 역쟁(力爭)할 테니 한국민은 단합하라는 대답을 하였다. 이는 김구와의 만남 이전부터 장제스가 윤봉길의사의 의거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카이로 회담 결과 발표한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① 3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 ② 3국은 야만적인 일본에 가차 없는 압력을 가할 것을 결의하였다.
  • ③ 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 응징하나 모두 영토확장의 의사는 없다.
  • ④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여러 섬을 박탈하고, 또한 만주·타이완·팽호제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축출한다.
  • ⑤ <특별조항> 한국의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독립을 보장하는 내용을 국제적으로 합의하였다.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

※ 참고로 윤봉길의사의 상하이의거로 인하여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주창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장제스 주석이 연합국 수뇌들을 설득하여 카이로선언문 특별조항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조항을 넣어 독립의 단서를 마련하였고, 이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이어졌다. 카이로선언과 매헌 윤봉길의사 상하이장거의 연관성에 관한 자료를 소개하면

각계 선열들의 칭송과 해설

우남 이승만 관련 자료 이미지
우남 이승만 雩南 李承晚 : 「屠倭實記(도왜실기)」 서문 중에서

“尹義士의 상하이 사건은 중국 군대 중에서도 최정예를 자랑하는 十九路軍이 수개 朔을 두고 악전 고투하였건만, 일찍이 머리카락 하나 건드려 보지 못한 倭軍官民의 수뇌부를 한국의 한 청년이 일거에 도륙하고 말았으니, 去去益甚한 침략으로 倭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던 당시 4억만 중국 민중의 환호와 감격은 넉넉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즉 자기네의 원수를 무명의 한국 청년이 갚아 준 격이니, 於是乎 중국 관민은 한민족의 열렬한 祖國魂과 한인의 독립운동이 엄연히 尙存해 있음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고, 세계도 또한 한국 독립의 難問題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새삼스러이 깨닫게 되었다.

尹義士의 壯擧가 있은 이후로 중국 관민의 한인을 대하는 태도는 우호의 신뢰로 일변하여 한·중 양국은 자고로 脣齒의 관계에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으니, 국민 정부는 물론이요, 蔣介石主席 夫妻가 金九선생을 절대로 신뢰하여 음으로 양으로 대한 임시정부를 성원해 준 것은 모두 이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중에도 한국해방의 단서가 된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 주석이 솔선해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창하여 연합국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은 역시 그의 원인이 윤봉길의 장거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屠倭實記(도왜실기)」, 국문판 1946. 2월
성재 이시영 省齋 李始榮 (독립운동가, 초대부통령) 선생의 회고

“우리가 조국을 되찾고 조국 땅을 밟게 된 것이 모두가 윤의사의 덕이오. 우리 임시정부와 윤의사를 비겨서 말하자면, 갓 난 어린이가 깊은 연못에 빠져서 금방 가라앉는 위급한 찰나에, 윤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 속에 뛰어 들어 이 어린이를 번쩍 건져 구해 주었소. 이 어린이가 자라서 오늘 삼천리강산을 달리고 있는 것이오.”

- 1945년 12월 2일 죽첨장(경교장)에서 윤남의·윤종을 만난 자리에서
소해 장건상 관련 자료 이미지
소해 장건상 宵海 張建相 (독립운동가) 증언

“임정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에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특히 윤 의사의 의거가 있기 전에는 임정은 참 외로왔습니다. 장개석이 임정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 푼 안 도왔습니다. 윤의사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돕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집이라든지 양식이라든지를 정식으로 도와주기 시작했지요.”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p.251, 1988. 10. 25.
곽상훈 관련 자료 이미지
곽상훈 郭尙勳 (독립운동가, 국회의장)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의사가 불굴 호매 장열의 대기상으로 조국의 광복 제단에 성혈을 뿌리신지도 어언 35년! 민족의 번영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살신성인한 애국영웅이 동서고금을 통해 비단 윤의사뿐이리오만 윤의사처럼 그 장거의 의의와 영향이 큰 것은 역사적으로 그 예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윤의사의 그 위대한 장거로 말미암아 당시의 세계정세를 보아 왜적의 군사력에 극도로 위압된 중국정부와 중국 국민의 항일의식을 격동구발시켜 항일전쟁을 수행케 함으로써 조국광복을 보다 빠른 시일 안에 가져올 수 있는 역사적 획기점 이었음은 물론 감히 백만 중국군이 하지 못한 위대한 장거를 윤의사가 단신 성취했다는 장개석총통의 극찬과 이로 인한 중국정부의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물심양면의 적극적인 후원과 더 나아가서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총통이 한국의 즉시독립을 강력히 주장한 역사적 동기를 이룩했다는 사실과 일본제국주의의 허망된 망상에 근거한 아세아 및 세계침략의 야망을 전세계에 폭로하여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주국가에 일대경종을 울림으로써 소위 태평양전쟁을 통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국제정의에 입각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점에 우리는 윤의사의 살신성인을 민족사적 의의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 차원에서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따라서 윤의사의 25세란 짧은 일생의 성웅적 족적은 그 하나 하나가 우리조국 근대화와 민주정치수립의 혁혁한 수범이며 자손만대에 민족정기를 조약시키는 광명인 것이다.

동아일보 「광복제단의 위업 되새겨, 윤봉길 의사 35주년기(周年忌)」 1967. 12. 19.
조경한 관련 자료 이미지
조경한 趙擎韓 (전 상하이임정국무위원)

“이 일이 있기 전 몇 해 동안은 한중(韓中) 혁명 기관 및 개인 사이는 서로 접촉이 냉담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혁명 원조 손중산(孫中山) 선생의 재세시에는 한중 상호 관계가 퍽 친밀하여 중국 임시정부는 한국 임시정부를 ‘사실 승인’도 해 주었으며, 한국의 애국 청년들을 중국의 군사교육 기관 및 기타 교육 기관에 무료 입학을 허여하고 심지어는 도미(渡美)유학의 편의까지 알선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손 선생이 별세하고 장개석 씨가 그 뒤를 계승하자, 한인 청년을 자기가 경영하는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에 입학케 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장 씨의 북벌(北伐) 당시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분열·투쟁을 벌이게 되자 한국인 황포 학생 중 적지 않은 무리들이 중공에 가담하여 장씨에게 반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장씨는 그들을 체포하여 효유도 많이 했으나, 그들 가운데 시종 반성치 않는 자들에게는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로부터 장씨는 한국 기관과 인사에 대하여 경원·냉담해 왔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가 이번 윤 열사의 의거가 있은 후로부터는 한인에 대한 냉담과 반목이 일시에 걷혀지고 물심양면의 원조를 아끼지 않았는데, 박찬익(朴贊翼) 선생의 알선으로 윤 열사의 의거 후원자인 백범 김구선생은 장 개석 씨와 만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장씨는 한국 임시정부·한국독립단·한국광복군의 각종 사업에 호의와 열성으로 응원했으며, 한국인 일반 혁명가 가족에 대하여도 전시지원을 적극적으로 해 주었다. 그리고 전쟁이 종식되어 갈 무렵, 카이로 세계 정상 3거두 회의에서는 ‘한국 전후 즉시 독립’을 제안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요약해 말하자면, 한·중 양국의 중간 격리를 깨뜨리고 완전히 한·중 합작으로 끌어들여 결국 국제 정상 회의에서 ‘한국 전후 독립 결의’까지 보게 된 것은 통틀어 매헌 윤 열사가 끼친 절대한 공효 때문인 것이다.

자고로 열사의 광채와 공덕은 길이 후인의 흠모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망국 전후에도 무수한 열사가 있었지만, 매헌처럼 의거에 좋은 적시를 만났던 예를 찾아보기는 드물다. 도살한 대상이 적의 많은 거괴(巨魁)들이며, 그 덕택으로 즉시 한국 독립운동자들이 봉착한 온갖 애로들이 제거되었고, 독립 사업 성취를 위한 활발한 촉진제가 되었으며, 국제적인 면에서는 국제 합작과 한국 전후 독립의 약속까지 얻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안으로는 일반 국민에게 “이번 전쟁 말기에는 왜적은 반드시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독립된다.”라는 무한한 희망의 양식과 절대한 용기를 제공해 주었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매헌의 의거는 청사에 빛나고도 남음이 있다.”

「나라사랑」 25, 「푸른 피가 천추를 거슬러」, 1976. 12
위당 정인보 비문 탁본 이미지
위당 정인보 爲堂 鄭寅普 : 예산읍의 추도비문 중에서

상하이의거 16주년 기념으로 충청남도 예산군 교육회와 충청남도 선열유적보전회는 예산읍 옛 호서은행(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66호)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 위당 정인보가 비문을 짓고 일중 김충현이 비문의 글씨를 썼다. (윤봉길열사비 1949. 4. 29.)


< 비문 >
왜적이 우리를 잣밟고 또 중국을 노리여 우리 독립선언한 지 십삼년 서력 천구백삼십일년 일월에 상하이를 포격하야 중국 십구로군의 장렬한 항전으로도 마층내 부지하지 못하니 그 위승호 협정은 중국 사억만이 참을 수 없었다. 그해 사월이십구일은 적의 경일이라 전승한 자랑과 아울러 상하이가 축하속에 싸히던 지음에 정오 거의 되자 대지가 뒤집히는 큰 폭음이 나며 훙커우공원 경축대에 모아 있던 적의 육해군 수령, 공사, 총영사 거구러지고 쓰러지고, 눈 빠지고, 다리 부러지고, 한 사람도 버서난 자가 없었다. 적은 중국 사람을 의심하였으나 얼마 아니하야 대한사람 윤봉길 이름이 온 세계에 퍼지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우리의 적을 죽이는 것이 의다. 중국만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 준 바 아니었지마는, 중국은 열사의 의를 더욱 고마워하야 바릇 전 서울·평양에서 적의 이간에 넘어서 중국상민을 박해한 일로써 두 민족 사이가 자칫하면 험악할 뻔하게 되던 것까지 구름 걷히듯 하고, 우리 독립의 큰 힘을 아끼지 아니하고저들 하였으니 장중정 총통이 우리 독립을 선창할 때도 윤봉길 열사의 저 때에 던지던 폭탄 소리가 귓가에 새로왔을 줄 안다.

열사가 스물 다섯에 이 일을 하고, 이듬해 십이월 십구일 적의 땅 대판에서 적의 총에 의로운 일생을 마쳤다. 김백범선생이 입국하면서 덕산시량리 렬사의 집을 찾어가서 제사하고 그 뒤 대판으로부터 유골을 찾어다가 국장의례로 리봉창 백정기 두분과 나란히 효창공원 구광뒤에 봉장하였다. 이제 례산군교육회에서 중소학생의 정성을 모아서 렬사의 고향에 비를 새우니 우리나라에 우리정부가 선 이듬해다. 렬사가 살아계셨드면 겨오 마흔넷이다. 이제 례산군교육회에서 중소학생의 정성을 모아서 렬사의 고향에 비를 새우니 우리나라에 우리정부가 선 이듬해다. 렬사가 살아계셨드면 겨오 마흔넷이다.

대한민국 삼십일년 사월이십구일에 세우다.
충청남도 예산군교육회 충청남도선렬유적보전회
대한민국정부 감찰위원장 정인보는 짓다. 경동공립중학교 교사 김충현은 쓰다
장제스 총통 초상 이미지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
‘중국의 백만군인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장제스총통(1887~1975)
카이로선언문 (1943.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