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매헌서포터즈_김현재]매년 4월 29일, 독립운동을 위해 필사적이었던 상하이 의거일을 다르게 해석한 전시에 다녀왔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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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매헌 서포터즈 2기 현재입니다. 저는 이번 활동을 통해 ‘매헌 윤봉길 의사’를 주제로 콘텐츠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콘텐츠는 4월 29일, 상하이 의거일을 맞이해 기획했습니다.
독립운동가/농촌계몽운동가/시인 관점으로 본 윤봉길의 생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농촌계몽운동가 윤봉길의 삶]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기의 도중도라는 마을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의 큰아들로 태어났습니다. 6세에 큰아버지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1살(1918년)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다 1919년에 3.1 운동이 발생하면서 3월 3일에는 예산에서도 만세 시위가 진행되었고, 그 이후에 덕산과 인근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다 일본인 교장의 수업 중단과 학생 귀가, 일제의 탄압 현장을 지켜본 것을 계기로 ‘일본인이 되라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라는 뜻을 밝혀 보통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그리고 상하이 의거 이전인 1926년부터는 농촌계몽운동가로서 활동했습니다. 먼저, 1926년에는 야학당을 개설해 남녀노소 누구나 한글, 역사, 지리, 산술, 과학, 일어, 농사지식 등을 배울 수 있게 했고,
그뿐만이 아니라, 1927년 3월에는 두레 정신을 바탕으로 한 농산물의 증산운동, 공동구매조합 운동, 토산품애용 운동, 부업 장려 등을 진행하면서 야학뿐만 아니라 농민 경제의 자립을 위해 농민회를 조직해 농촌부흥운동을 펼쳤고,
1929년 4월에는 야학교, 농민강습소 운영, 강연회를 통해 국내외 정세와 지식을 보급했고, 공동판매 및 저축증대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농촌계몽운동 이후에는 학예회(1929년 3월)에서 진행한 이솝우화를 각색해 만든 ‘토끼와 여우’ 연극을 상연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덕산주재소)는 연극의 내용 중 “토끼와 거북이가 빵 조각을 나눠 먹으려고 하자, 여우가 반씩 나눠준다는 핑계로 빵을 다 먹어버렸다.”라는 내용에서 여우를 일제에 비유했다는 구실로 윤봉길을 검문했습니다.
당시에 윤봉길은 ‘토기와 여우’ 연극이 단순한 아이들의 촌극이라고 변명하고, 일제의 경고, 훈계 후에 풀려났지만, 고초를 겪었던 이 일을 계기로 민족의 독립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에 광주학생운동(1929년 11월)이 일어난 것, 경찰에 의해 야학이 폐쇄당해 3주 동안 옥고를 치른 것을 계기로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 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도 3월 7일, 평안북도 선천에 다다르면서 사복 경찰 때문에 10일 동안은 고초를 겪었고, 세탁소 점원, 인삼 판매원, 말총으로 모자 등을 만드는 종품 공장 등에 취직하면서 여비를 마련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게다가 일제는 대한민국과 중국의 사이를 이간질하였습니다.
1931년 7월, 중국 지린성 창춘현에서 있었던 '만보산 사건'이라고, 일제의 술책으로 인해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수로를 둘러싸고 충돌했던 사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조선인과 중국인 둘 다 경미한 부상자가 나온 것으로 끝났으나, 일제에서는 이를 악의적으로 "한국인 측의 피해가 크고, 상황이 위급하다."라고 과장-왜곡 보도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이후, 국내 각지에서 조선인들은 중국민 배척운동을 전개했고, 중국인 희생자가 다수 발생하면서 대한민국과 중국의 사이가 나빠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까지 끊기는 건 물론, 당시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으며 심지어 한국을 일본의 스파이로 보는 관점까지 생길 정도로 불신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임시 정부의 활동에 큰 제약이 되었습니다.
물론, 일제는 본색을 드러내어 일본군이 1932년 1월 28일, 상하이를 침공하면서 3월 1일에는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다 김구 선생님이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에 상하이 사변 전승 축하식과 같이 거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윤봉길은 거사계획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932년 4월 26일,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혈서로 입단 선서문을 쓴 후, 의거일인 4월 29일, 도시락 폭탄과 물통형 폭탄을 들고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제창되었을 때, 단상 중앙을 향해 던졌습니다.
이후, 상하이 한인 교민을 무작위로 체포했고, 안창호, 이유필 등을 검거, 김구는 도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 국민당정권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일본군, 외교관, 무관 등 주요 인사들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 사망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 사다쓰구 사망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중상(왼쪽 발 일부 절단)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 제3함대 사령관 중상(실명)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중상(오른쪽 다리 절단)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쓰, 토모노 모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 서기장 중상
[윤봉길의 또 다른 모습, 시인으로서 확인해보았습니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전시 <매헌의 꿈, 시에 담다>}
(후략, 이후 이야기는 기념관과 이현재 서포터즈의 블로그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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